오는 6일 열리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한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 대기업 총수들이 증인으로 출석한다. 사진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손경식 CJ 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더팩트 DB

[더팩트ㅣ명재곤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달 29일 '대통령직 퇴진 국회 위임'을 국민담화 로 발표하기 약 2시간 전 출처불명의 문자가 SNS(사회적 관계망 서비스)에 나돌았다. 내용은 이렇다. '오후 2시 대통령 퇴진관련 발표. 국회나 정치권에서 방향을 정하는 대로 퇴진을 하겠다는 입장이라고 함.'

박근혜 정권 속성상 '자진 퇴진' '백기 투항'은 절대 없을 것으로 판단한 터라 흔한 '찌라시'로 무시했다. 그런데 증시는 이른바 '문재인 테마주' '반기문 테마주'가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요동을 쳤다.

박 대통령은 그날 오후 2시30분 자기변명에 불과한 담화를 내놨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암약한 이권성 작태를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이라고 강변했고,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며 정치적 기교를 부렸다.

문자속 '퇴진'이 '조기 대선'재료를 부추겨 대권후보 테마주들은 춤을 췄다. 경제는 조금이라도 예측 가능한 상황과 단서만 있더라도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준 하루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최대의 적은 '불확실성'이다. 정치적 불확실성은 예측가능한 경제운영을 가로막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내년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0%에서 2.6%로 하향조정하면서 '정치적 불확실성'을 그 이유로 들었다.

우리 경제가 불확실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경고음이 곳곳에서 나온다. 정치권이 자기 셈법에 빠져 명확한 박 대통령 신변 처리 방향 및 차기 대통령 선거 일정을 조기에 추출하지 못하는 게 주요 이유 중 하나일 게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와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왼쪽부터)가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귀빈식당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조율을 위한 야3당 대표 회동에 참석해 손을 맞잡고 있다./배정한 기자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와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왼쪽부터)가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귀빈식당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조율을 위한 야3당 대표 회동에 참석해 손을 맞잡고 있다./배정한 기자

기업이 경영계획을 그릴 때 정치변수는 핵심 항목이다. 특히 내년처럼 새 정권이 들어서는 시기라면 더욱 그렇다. 정권의 정체성과 그에 따른 정책 줄기, 정책 입안자들의 성향을 나름 진단하면서 경영 공수책을 짜야 한다. 그런데 현 탄핵정국 상황에서 기업들의 예측력은 어느 때 보다 제한적이다. 여야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파열음을 내고 있는 정국에서 내년 경영구도를 잡는 게 간단치는 않다.

실제로 삼성 등 유수 그룹들이 연말 정기인사와 조직 재정비, 신사업 구상 등 가장 분주하게 움직여할 시기에 정치권 풍향만 보면서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다. '박·최 게이트'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그룹들은 정기인사를 단행하면서 제 갈 길을 가지만 총수들이 국정조사 증인으로 채택된 대기업들 사정은 다르다.

'총수가 국회에 불려가 증인석에 서야 하는데 한가롭게(?) 정기인사를 단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재계측은 반문한다. 절대적 권한을 휘두르는 오너 경영체제에서 총수의 심기보호가 최우선임은 두말할 나위 없기에 십분 이해는 간다.

'정경유착'의혹 속에 이래저래 경영 시계(時計)는 멈췄고 경영 시계(視界)는 깜깜하다.국정조사와 특검 수사과정에서 재계는 '최순실 리스크'를 떠안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국조에서 그룹 총수가 추궁당하고 특검에 재차 불려 나가는 모습이 달갑지는 않겠지만 어쩔 수 없다. 모 총수는 자업자득이고 모 총수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

대통령과의 독대과정에서 대가성 밀담이 있었는지, 아니면 정치권력에 억눌려 어쩔 수 없이 ‘돈’을 댔는지 결자해지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국민적 의혹을 해명하지 못하면 오너 리스크는 총체적 기업 리스크로 고스란히 넘겨진다.

시장론자인 김인호 한국무역협회 회장은 얼마 전 "정부와 기업간의 관계가 얼마나 불법적이었는지는 법이 판단할 문제"라고 전제하면서 "정부와 기업의 비정상적인 관계는 (차제에) 완전히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혜와 대가성 거래를 은밀히 추구하는 기업들 양태가 뒷거래를 종용하고 압박하는 정치권력 이상으로 문제라는 지적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박·최 게이트'에서 편법적이고 불법적인 편의와 이익을 취한 기업이라면 국조와 특검에서 명백히 밝혀져 처벌을 받아야 함은 마땅하다. 그룹 총수들도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직 거취에 관련한 3차 대국민 담화를 하고 있는 29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대합실에는 많은 시민들이 뉴스를 지켜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정치권 일정과 법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임세준 인턴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직 거취에 관련한 '3차 대국민 담화'를 하고 있는 29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대합실에는 많은 시민들이 뉴스를 지켜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정치권 일정과 법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임세준 인턴기자

비선실세 국정농단에서 촉발된 국가적 리더십 부재 상황은 특히 경제 분야에서 그 충격파가 크다. 소비자 물가가 슬금슬금 오르고, 가계부채는 급증하고, 시중 금리와 환율은 고공 행진을 해도 경제 정책은 찾기 힘들다. 새로운 리더십을 정립하는데에 시간이 길어 질수록 경제의 그늘도 깊어진다.

단적으로 정치적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첫 작업은 대선 시간표를 작성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일단 대통령직 임기단축을 포함한 진퇴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겼다. 정치적 복선이 깔려있는 대통령의 제안을 두고 야권은 '즉시 퇴진(하야)'을 요구하고, 여권은 '질서 있는' 퇴진을 말한다. 대체로 여야가 대통령의 조기 퇴진 불가피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오락가락 자기 목소리만 내고 있다.

국회에서 '촛불 민심'을 외면하고 정략적 주장만 편다면 선의의 서민들은, 기업들은 하루하루가 더욱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대책 없이 경제가 멍드는 걸 경계하는 정치인도 있어야 한다.


sunmoon419@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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