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주년 5·18 광주민주화운동기념식이 18일 오전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거행된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분향을 하고 있다./더팩트 DB

[더팩트ㅣ명재곤 기자] 착검 상태의 M16 소총을 든 무장군인 3명이 10여m 뒤에서 살기등등하게 쫓아왔다. 1980년 5월, 한 고등학생은 당시 광주 대인동 시외버스터미널 인근 항쟁의 현장에서 온 힘을 다해 무작정 달렸다. 잡히면, 넘어지면 끝이라는 공포감뿐이었다. 겁에 질릴 새도 없었다.  

100m 넘게 냅다 달리다가 눈에 들어온 철공소로 뛰어 들었다. 몸을 숨겨보려는 의도였으나 공장 문은 닫혀 있었다. 그래서 공장 외벽의 약 3m 높이의 철 스크랩 더미 위로 발을 내딛고 옆 건물(주택)로 월담을 시도했다. 스크랩에 발목이 잔뜩 긁히면서도 머리부터 몸을 그냥 던졌다.

‘쿵~’소리에 놀란 아주머니께서 학생을 부랴부랴 집안 장롱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숨어 있으라며. 한참 뒤 주변에 별 다른 움직임이 없자 아주머니는 "우리 아들도 어제 시내에 나갔는데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며 말을 잘 잇지 못하면서 학생에게 빠져나갈 길을 가르쳐 줬다.  

이 고등학생에게 '전두환(全斗煥)'은 37년이 지난 오늘에도 '전두환(前頭患)'으로 남아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커녕 일상적 호칭 '전두환 씨'조차 입에 올리지 않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37주년에 문재인 대통령은 '오월 광주' 때 발포 명령자를 찾아내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했다. 발포 명령자의 이름 뒤에 붙는 호칭(직책)을 밝혀 내는 게 민주정부 3기의 큰 과제가 됐다.  

제19대 대통령 취임 선서 행사가 10일 낮 12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에서 열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행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더팩트DB
제19대 대통령 취임 선서 행사가 10일 낮 12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에서 열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행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더팩트DB

특정인의 사회적 위치나 역할을 일면 드러내는 호칭(呼稱)은 화자(話者)의 감정이 묻어 있기 마련이다. 이념적 마당에서는 더욱 그렇다. 존중과 경멸의 대상이 '자신(과의 관계)'을 경계로 구분되고 이해득실, 갑을(甲乙)에 따라 호칭은 달라진다. 상식과 예의에 바탕을 둘 수도 있겠지만 계산과 의도가 어떤 이의 호칭을 규정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 같다.

한미 간 정상회담에서도 의도적인 호칭으로 보이는 일탈 때문에 뒷말이 나올 때가 종종 있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2001년 3월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1차 정상회담후 기자회견에서 김 전 대통령을 '디스 맨(This man)' 이라고 말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디스 맨은 '이 사람' 정도의 뜻으로 통용되는 말로 외교적 수사로 적절치 않았다는 비판이 일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당시 상황과 관련, "친근감을 표시했다고 하나 매우 불쾌했다. 나는 한국의 대통령이었고,우리의 정서를 살펴야 했다"며 '디스 맨'호칭에 대한 언짢은 심경을 피력했다.

부시 대통령은 2003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도 '만만한 상대'로 해석될 수 있는 '이지 맨(Easy man)'이라고 노 전 대통령을 지칭해 잡음이 일기도 했다.

최근 진보성향의 모 인터넷 매체가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의 호칭을 '김정숙 씨'로 다룬 것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문 대통령 열성적 지지자들은 대통령 부인 호칭을 '여사'가 아닌 '씨'를 사용한 걸 두고 "예의을 지키지 않은 것 아니냐"는 비판을 줄기차게 가하고 있다.

해당 매체는 "대통령 부인을 '씨'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글쓴이의 선호와 문맥상의 필요에 의해 '여사'로 쓰는 것도 허용해 왔다"고 해명했다. "대통령 부인으로서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라는 '독자님들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 그 뜻이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사실상 사과했다. 그러나 지지자들 반발 여론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모양새다.

전화나 SNS상 항의는 물론이고 후원금 중단, 광고주 불매운동 기미마저 보이고 있다. '여사'와 '씨'가 사전적으로는 똑같은 높임말이다, '여사'는 남성 의존적 호칭이기에 성 형평성 차원에서 그 쓰임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객관적 설명에도 귀를 열지 않는다. 여사 호칭이 권위주의적이고 일제 식민주의 잔재라고 인정하면서도 그 조차도 매체가 독자를 일방적으로 계몽하려는 우월주의에 빠진 적폐라고 힐난한다.  

17일 SBS 캐리돌 뉴스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타임지 표지를 일베 이미지로 사용해 공분을 사고 있다./SBS 캐리돌 뉴스 방송,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17일 SBS '캐리돌 뉴스'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타임지 표지를 일베 이미지로 사용해 공분을 사고 있다./SBS '캐리돌 뉴스' 방송,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문재인 정부에 대한 편파적이거나 공격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매체들에 대해선 기존 이념적 친밀성과는 상관없이 모두 '적폐'의 그늘로 몰아 넣으려는 듯한 기운마저 일부에서는 보여 섬뜻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일베 이미지'가 그의 친구가 정권을 잡아도 전파를 타는 마당이다. 열성 지지지들이 '호칭'논쟁에서 '빠'의 과도함을 굳이 숨기지 않으려는 집단 의식은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해는 간다. 참여정부 시절과는 다른 진보 언론 관계를 설정하려는 저의도 읽을 수 있다. 대(對) 언론전선에서 참여정부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거친 몸부림이다.

지난 9년 동안 축적된 결기가 '밥도 혼자 퍼서 먹었다' '김정숙 씨' '덤벼라 문빠들' '개떼나 주인'이란 표현, 호칭 등과 격하게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호칭은 힘이고 질서이고 연대의 고리이다. 반대로 갈등과 대립, 길항의 요소로도 충분히 작동할 수도 있겠다 싶다. 호칭에 필자의 정서가 배어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하는 새 정부 출범 초기다. 설마 '김정숙 여사' 표기 매체는 친 정부, '김정숙 씨'호칭 매체는 반 정부 언론으로 분류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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